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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
I, i


류장복, 류해윤
더 소소
2024. 8. 16 - 9. 13

 

당신을 떠올리며

 

      실물이나 경치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여 화면에 담는 것을 화가의 업이라 여기는 류장복에게 사생은 회화의 가장 주요한 수단이자 작가적 태도를 함축하는 말이다. 특히 세상을 바라보는 나라는 시작점을 명징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그의 사생은 시각적 재현을 넘어 이미지를 보는 순간의 기억과 감정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포함하여 왔다. 이를 위해 그는 그림의 소재가 된 마을을 수없이 찾아가 거닐고, 마주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언어로 기록하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한 회화를 완성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왔다. 사생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 이어온 그의 사유는 요 몇 년간 불쑥불쑥 찾아오는 어느 이미지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노년에 접어든 아버지가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는 모습. 작가 류장복은 70세가 넘어 붓을 잡고 20여년간 작업을 이어가다 3년전 돌아가신 아버지, 류해윤 작가를 자주 떠올린다. 일본의 식민통치 시절과 조국의 해방과 분단, 6.25 전쟁, 경제적 정치적 고성장의 시대를 모두 거친 그는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 터를 잡고, 복덕방과 세탁소를 운영하며 부단히 삶에 충실했던 아버지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화가 아들에게 부탁한 아버지의 초상화가 차일피일 미뤄지자 본인이 직접 그리게 된 것을 계기로 생애 마지막을 그림으로 가득 채웠다. 류장복은 아버지와의 기억 중에서도 유독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이유 없이 계속 떠올랐다고 한다. 대상과의 관계를 언어화하여 이해하고 그림을 그려온 그가 이 이미지에 대한 해석에 몰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늘 회화의 본질과 화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그에게 정규 미술교육을 받아본 적 없이, 우연한 계기로 그림을 시작해 20여년 넘게 작업을 이어간 아버지의 존재는 분명 언제나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는 탐구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작가 류해윤은 복덕방 한 켠에 마련한 책상에서 틈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으며, 생업을 정리한 후에는 몰두하여 매일같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 그림들은 모든 면에서 거리낌이 없었는데 달력 뒷면, 남은 벽지, 인조 가죽에 사인펜, 포스터 물감 등 소박한 재료를 거침없이 사용하였고, 대상도 가족의 모습부터, 고향 풍경, 유명한 관광지, 동물, 꽃, 기차 등 다양했다. 작업의 면면은 더욱 자유로워서,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접한 인상깊은 장면을 보면 그것을 떠올려 몇 번이고 그리고, 자신의 과거 기억이 첨가되기도 했으며, 본인이 언젠가 보고 멋스럽다 생각했던 그림이나 디자인이 등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작가 류해윤이 생전 자신의 그림에 대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려지지 않는다는 불만을 가졌다는 것이다.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안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그에게 즐거움이 그림의 원동력이라면, 생생한 재현은 그 목표였을 것이다. 비례가 맞지 않은 표현과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장면, 정형화된 산수의 표현 등, 다양한 요소가 뒤섞인 그의 작업은 시각적인 재현으로서는 마땅치 않으나 그가 알고 감각하는 세상에 대한 충실한 증언이었을 것이리라. 가보지는 않았지만 금강산과 백두산은 호랑이가 나오는 울창한 숲이고, 쭉 뻗은 고가도로 아래를 흐르는 강가에는 응당 고깃배가 있을 것이며, 기찻길 위에는 최신 고속열차와 기억 저 너머의 디젤 기관차가 동시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각막에 비친 것이 아니라 기억과 감각과 마음에 비친 장면이다. 류해윤 작가는 그 장면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그려나간 것이다.


      류장복은 계속해서 떠오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언어화한다. 그것은 일상이었다고. 아버지가 그린 그림들은 띠처럼 이어진 삶의 면면이었다고. 자연스러운 일상의 흐름 속에서 자유롭게 그린 그림들은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생활에 충실한 그런 것들이었다. 류장복은 이제 순서를 바꿔, 언어를 가장 뒤에 두고 삶에 깊숙이 들어간다. 일상에 온전히 편입하여 그 마음 그대로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모든 장면은 연결되고, 그림과 언어도 하나가 되고, 기억과 시각이 겹쳐지며, 삶과 예술이 만난다. 띠처럼 연결되는 그림을 그린다. 아버지, 당신을 떠올리며.



 

전희정 (갤러리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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