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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밍 허밍
 
김윤수
2021. 10. 23 - 11. 21

허밍, 그리고 하모니

 

 

하루의 사이사이, 나지막이 읊조리는 생각들은

가벼운 운율로, 후렴구로, 반복되곤 한다

바람에 의해 흐르고 흩어지고 떠있고 떠도는 사막처럼,

밀도, 부피, 무게, 깊이와 넓이를 달리 하는

모든 것이면서 내가 없는 완전한 순간들.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바람이 쉼이 없이 세상의 모든 경계를 어루만져주듯이

                                        <허밍 허밍> 노트 중에서

 

 

최소한의 몸짓. 물질을 온전히 다룰 수 없음이 매혹의 이유가 된다. 흑연이나 바다 저편의 색인 울트라마린 파스텔을 가루 내고, 물감을 허공에 떨어뜨리며, 흩어지는 것들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고, 흐르는 것들로 덩어리를 만든다. 발바닥을 초기의 틀로 삼아 비닐에 연차적으로 선을 긋고, 오리고, 쌓아가는 나의 손들은, 그렇게 순간순간 발생하는 수많은 우연과 오차들의 변곡점을 느린 속도로 지난다. 오롯이 계획되어질 수 없었던, 남겨진 모습 이면에는 몰입하고, 흩어지고, 머무르고, 흥얼거렸던 수만 겹의 시간이 있다.

 

허밍의 사전적 의미는 입을 다물고 부르는 콧노래로 합창에 많이 쓰인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가 되지못한 자리, 그리고 함께하는 순간, 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그것은 보다 사적이고, 홀로이되 함께였던, 다독임에 가깝다. 전시<허밍 허밍>은 어느 옛날을 생각하며 숲에서, 길에서, 작업실에서, 혹은 그 모든 사이사이 에서, 잠시 혹은 오랫동안 어느 저편으로 향했던 경계 없는 마음들의 하모니이다.

 

<안부>에서 고이 간직하고 있던 오랜 편지는, 또 다른 한해의 계절을 수놓던 들꽃들과 짝을 이루고, <명랑한 야심 속을 걸으며>, <불멸>은 산책에서 마주했던 것들, 주워온 것들이, 간간이 중얼거리던 마음을, 책속의 문장을, 소환하여 재구성된다. 무던히 바람이 되고자 했던 몸짓들<연습>은 바람에 의해 모습을 달리하는 사막으로부터 근원을 찾고, 또 여럿이 어울리어 흐름을 만든다. 그렇게 지금 여기와 어느 저편이 함께한다.

 

그 행간 여기저기에‘울트라마린’의 푸른 적막이... 투명하게 떠있고<바람의 표면>, 아득한 깊이와 넓이로 흩어지고<(표류)-그녀의 바다에서 그의 하늘까지, 그녀의 산과 그의 구름사이>, 환하게 피고<꽃꽂이>, 중력의 구멍으로 빠져들고<바다 저편>, 도착하지 않으며 떠돈다<(바람이 쉼이 없이 세상의 모든 경계를 어루만져 주듯이)>.

김윤수

바람의 여정

전희정(갤러리 소소)

 

《허밍 허밍》은 김윤수 작가의 여정이다. 청명하고도 깊은 파란색, 울트라마린블루의 한 점에서 시작되는 이 여정은 조용히 읊조리는 허밍처럼 바람을 타고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른다.

 

이것은 허밍이다. 김윤수 작가의 작품은 지금 여기와 어느 저편을 관통하는 바람의 형태를 가진 소리, 허밍이다. 그 바람은 작가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엽서에서 산책하던 길가의 풀잎으로, 저 멀리 사막으로 여행을 떠난 친구가 밟은 사막의 모래로 이곳저곳을 떠다닌다. 순간순간의 느낌은 텍스트로, 오브제로, 엽서로 남아 작품의 모양을 갖춘다. 흘러가던 바람은 파스텔이라는 부드럽고 고정되지 않는 재료를 사용한 드로잉으로 흔적을 남겼다가 수십 겹의 발걸음으로 만들어진 PVC조각에 머물기도 한다. 작가의 생각과 감정은 일상의 순간들을 흐르며 그녀의 손을 통해 작품에 머문다. 귀에 들릴 듯 말 듯한 허밍은 이렇게 이곳 저곳으로 흐르고 흐른다.

 

이것은 허밍 허밍이다. 작품들을 맴도는 허밍은 수많은 허밍과 조응하기 때문에 메아리처럼 반복된다. 어릴 적 아버지가 보내온 엽서에 작가는 한 해의 계절을 걸으며 답장을 쓰고, 그 걸음의 여정은 곱게 말려진 꽃잎과 화면 가득히 채운 야생화 사진으로 남아 책의 문장과 조우하기도 한다. 친구가 보낸 사막의 흙은 쌓인 드로잉만큼이나 그 시간을 저장해 나간다. 하늘의 움직임을 담은 파스텔 드로잉은 서로 다른 순간을 이어내 흐름을 만들며, 깊은 블루의 캔버스는 높다랗게 쌓인 투명한 블루의 조각을 마주한다. 이렇게 작가의 소중한 순간과 생각들은 작업실의 공간으로 들어와 형태를 갖추고 다시 갤러리의 공간에 들어와 이 곳과 저 곳을 연결한다. 일상은 예술과, 작업의 공간은 전시의 공간과 서로의 허밍에 답하며 돌고 돌아 한자리에서 만난다. 그래서 이것은 허밍 허밍이다.

 

정해진 멜로디 없이, 노랫말 없이 허밍은 몸과 마음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와 널리널리 퍼져간다. 허밍은 허밍과 조우하며 다양한 공간 속에서의 순간들을 잇는다. 정처 없는 흐름에 몸을 맡긴 여정 《허밍 허밍》은 깊이, 더 깊이 모든 것이 연결되는 저 너머의 곳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풍경의 재구성

 

고충환(미술비평)

 

 

김윤수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경우로 치자면 투명 비닐 패드를 소재로 한 입체 조형 작업과 울트라마린 블루를 들 수 있다. 울트라마린 블루가 개념을 이끈다면, 입체 조형 작업은 그 개념을 조형으로 옮긴 경우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개념 축으로부터 다른 차이 나는 작업들이 파생되고 변주된다고 해도 좋다.

 

먼저 입체 조형 작업을 보면, 아마도 작가의 작업 중 상대적으로 뚜렷한 형태와 손에 잡히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작업에 해당할 것이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발을 모티브로 하는데, 몸에 대한 관심과 함께, 길, 여정, 여로에 빗댄 삶의 비유에서 착상된 것일 터이다. 작업에서 작가는 일정한 두께를 갖는 투명한 비닐 패드로 발 모양 그대로 오린다. 그리고 그렇게 오린 발 모양을 다른 패드에 대고 오리는데, 이때 패드 자체의 두께 때문에 과정이 진행되면서 점차 최초 형태가 뭉그러져 대략적인 유선형의 곡선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오린 발 모양의 패드를 쌓아 올려 하나로 중첩 시키면 최초 모본에 해당하는 형태 그러므로 꼭대기가 발 모양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형태 전체가 발자국이 지나간 자리 그러므로 발자국의 궤적을 하나의 지층처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존재가 지나간 자리, 존재가 지나가면서 남긴 자국을 흔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형태가 해변이나 사막에 아로새겨진 발자국 같고,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면서 남긴 모래톱 같고,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그러므로 바람이 자신의 일부를 남기고 간 움푹 파인 자국 같고(패드가 만든 형태 자체는 양각이지만, 투명한 탓에 음각으로도 보임), 패드와 패드가 겹치는 지점에 라인이 생기면서 층 구조를 만드는 것이 등고선 같고, 산 같고, 절벽 같고, 회오리 같고,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변화무상한, 그래서 덧없는 구름 같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발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발이 오만 데로 가면서 유사 풍경을, 의식(아니면 무의식)의 풍경을, 내면 풍경을 만든다.

비록 발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발이 오만대로 가면서, 의식을 따라 흐르면서 오만가지 형태로 변태 되는 형태가 의식의 흐름 기법(마르셀 프루스트)을 연상시키고,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는 점에서는 무정형(조르주 바타유)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이런 의식의 흐름 기법이나 무정형은 입체 조형에서보다는 구름 드로잉, 하늘 드로잉, 별빛 드로잉, 달빛 드로잉, 파도 드로잉과 같은 일련의 드로잉이나 이를 묶어낸 책 작업에서 더 흐릿하게, 더 희박하게, 더 애매하게, 더 섬세하게, 더 깊게, 더 시적으로 전개되고 확장되고 심화된다.

 

그리고 울트라마린 블루는 바다 저편에서 온 청색이라는 말이다. 그 말속에 오리엔탈리즘과 어쩌면 식민제국주의의 흔적이 묻어나지만, 작가는 그 색깔 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안료와 화구 점토와 사물을 가리지 않고 바다 저편에서 온 청색을 수집한다. 바다 저편에서 온 청색으로 그림을 그리고, 드로잉을 하고, 오브제를 만든다. 하늘을 그리고, 구름을 그리고, 별빛을 그리고, 적막을 그린다. 여기에 비닐 패드를 소재로 한 입체 조형 작업 역시 투명하고 깊은 청색을 떠올리게 된다. 바다 저편에서 온 청색에 대한 자발적인 마니아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한편으로 바다 저편에서 온 것으로 치자면 낭만주의도 있고 형이상학도 있다. 존재가 유래한 곳과 돌아갈 곳, 죽음과 내세, 영성과 숭고 같은, 형이상학의 부수물이 있고, 작가는 그 부수물을 그리고 만든다. 그리고 바다 저편에는 미처 의미화되지 못한 말들, 의미화되기 이전의 재료에나 해당할 말들, 의미화를 거부하는 말들, 그럼에도 억지로 의미화하면 왜곡되고 마는 말들이 산다. 그러므로 흐릿한, 희박한, 애매한, 섬세한, 깊은, 시적인, 아마도 바다 저편에서 추수한 말들을 재구성한 작가의 작업은 의미화(의미 바깥에는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된다)와 개념화(모든 것은 개념으로 환치되어야 한다)에 맞춰진 제도의 기획 그러므로 욕망으로부터 탈주선을 그리는 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림들, 드로잉들, 사진들, 오브제들, 설치와 설치의 부수물들, 두루마리들, 병풍 형식의 그림 구조물들을 매개로 시간의 법칙을 넘고 공간의 법칙을 넘어, 공간(그리고 아마도 시간)이 아득히 깊어지고 끝없이 넓어지는 곳으로 순간이동 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의 허밍 허밍(혼자 부르는 콧노래 혹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업은 시적이다. 일관된 서사, 닫힌 서사에 바탕을 둔 소설적 서사와 비교해보면 그 행간이며 여백이 넓은 편이다. 그만큼 비결정적이고, 가변적이며, 가역적인 구조이고 생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똑 떨어지는 자기 완결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 작업도 있지만, 대개는 무엇과 무엇이 만나고, 어디에 어떻게 놓이는지에 따라서 매번 그 의미가 달라지는, 그런, 열린 의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의미론에서는 그 자체 이미 의미를 담보하고 있는 의미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 논리가 의미를 만든다고 본다. 그림이든 오브제든 어떤 상황 속에 담길 때 비로소 의미는 발생한다는 논리다. 그러므로 상황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이처럼 상황 결정적 작업에서 연출(개념 연출과 공간 연출을 포함하는)은 사실상 창작의 또 다른 한 경우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작가는 개념을 연출하고 공간을 연출하면서 하나의 풍경을 재구성한다. 그렇게 매번 한 권의 시집 같은 풍경을 열어 놓는다. 그리고 여기에 순간이동이 가능한 접이식 풍경(그리고 아마도 상상력을 발휘하자면 휴대용 풍경마저)에 대한 발상도 주목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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