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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고요
Gray Silence


김기찬
무음산방
더 소소 기획
2024. 7. 3 - 7. 14

 

회색의 고요

 

김기찬

 

   연필과 종이는 서로 다른 물성을 가지고 있다.

H(Hard)는 단단하고 B(Black)는 부드럽다. H계열 연필은 종이에 단단하고 날카로운 선을 남긴다. 종이 올에 깊게 파고들지 못하고 표면을 가로지른다. 반면 B계열 연필은 종이 위에 부드럽고 짙은 선을 남긴다. 종이는 연필의 움직임에 맞춰 변화한다. 긁히고 눌리고 갈라지고 뭉개지며 표면에 미세한 변화가 생긴다. 흑연은 올 사이를 파고들며 다양한 어둠을 남긴다. 종이에는 미세한 요철이 생기고, 요철은 빛을 다양한 각도로 반사하며 깊이감을 더한다. 가령 부드러운 연필로 힘주어 긁고 지나간 자리는 표면이 매끈해지며 다시 광석과 같은 광택감을 드러낸다. 반면 가볍게 선을 쌓으면 표면의 결은 남아 따듯한 느낌을 준다. 오랜 시간 연필의 종류와 필압을 조절하며 때로는 강하게 눌러 짙은 어둠을 만들고, 때로는 가볍게 스쳐 밝은 빛을 표현한다.

 

   색은 사라지고 익숙했던 공간은 낯설어진다. 연필로 나름의 이야기를 품은 공간을 화면에 묘사한다. 도시의 변두리, 오래된 골목길, 낡은 건물 등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장소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일상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변화하고, 그 변화는 공간에 흔적을 남긴다. 각진 건물의 모서리는 무뎌지고, 간판의 글씨는 낡고 희미해진다. 고가도로 밑은 커다란 콘크리트 기둥과 철근구조물이 자리잡고 있다. 흔적들은 단순한 물리적 변화에 그치지 않고, 공간과 삶이 얼마나 깊이 얽혀있는지 보여준다.

 

   색이 사라진다는 건 단순히 색의 부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본질적인 요소들을 재발견하게 된다. 빛과 그림자의 관계는 색이 있을 때보다 훨씬 명확해진다. 빛은 물체에 부딪혀 그림자를 만들고, 그림자는 물체의 형태를 부각한다. 구조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며, 공간의 깊이와 질감은 한층 더 생생해진다. 흑백의 대비는 형태와 명암만으로 이루어진 시각적 명료성을 제공한다.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과 그려진 부분이 어긋나지 않도록 구조를 이해한다. 거리와 골목이 어떤 각도로 뻗는지, 건물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지붕의 기울기가 맞는지, 가로등의 높이와 간격은 일정한지 확인한다. 공룡 복원도가 단순한 상상이 아닌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것처럼 화면의 정보를 정확하게 분석한다. 부족한 정보는 온라인 지도 서비스인 로드뷰를 이용해 보완한다. 이해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은 견고해진다. 사실적 재현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그 순간이 지닌 감정과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달하려 한다. 시각적 소음은 사라지고, 회색의 화면에 집중하게 된다.

회색을 본다
 


안소연
미술비평가

 

 


   모서리의 한쪽 길이가 한 뼘 정도 되는 흰 색 종이 위에 연필로만 그린 그림에는 현실의 민낯처럼 무심할 정도로 평범한 풍경이 담겨 있다. 오래된 구도심, 재개발 지역, 구식 아파트, 고가도로 밑, 전선들로 뒤엉킨 전봇대와 얕은 하늘, 다닥다닥 머리를 맞댄 도시 뒷골목 상점들…. 김기찬은 켜켜이 쌓인 공간 속의 장면들을 사진 찍듯 포착해 그것을 마치 박제하듯 정교하고 섬세한 연필 소묘로 옮긴다. 처음에는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이 진부하고 평범한 풍경의 요소들이 눈에 익은 선명한 형태의 윤곽선으로 눈에 들어온다. 차츰 흰색과 검은색, 종이와 흑연의 경계가 뭉개지면서, 어둠 속에서 동공이 커지듯, 믿을 수 없을 만큼 시각의 스펙트럼을 펼쳐내는 회색의 형상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도대체 이 회색의 변화무쌍한 선과 선, 면과 면의 명도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빛의 흔적을 담은 흑백 사진과는 다른, 켜켜이 쌓인 물성을 눈앞에 찬찬히 펼쳐낸다.


   신기하게도 그는 이 회색 풍경을 그릴 때 흑백 사진이 아닌, 거의 현실의 색채 그대로를 간직한 사진을 본다. 직접 찍은 일상의 풍경을 회색의 연필 소묘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그는 사람과 같은 특정 움직임과 서사의 요소를 제거하면서 시야에 감지되는 일체의 색을 없앤다. 침묵처럼 고요해진 이 회색 풍경은, 빛의 움직임 마저 거대한 힘에 의해 오래 전 멈춰버린 것처럼 부동의 조각상 같다. 이러한 사태의 전환은, 색 바랜 고대의 조각들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빛이 바래 버린 변두리의 풍경에서 그것을 지탱시키는 거대한 힘, 말하자면 저 땅 밑의 중력과 저 구름 너머의 빛에 대한 뜻밖의 자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몇 해 전, 세로와 가로의 길이가 4cm에 불과한 작은 종이 위에 오래된 아파트 상단의 지붕과 벽을 연필로 섬세하고 정갈하게 그렸던 그는, 동네 풍경에서 발견한 구식 아파트의 건축적 질서에 대한 향수를 기념하려는 듯, 그 안팎에 현실의 얼룩처럼 덧씌워진 색과 냄새와 소리와 움직임을 흑백 명도 밑에 잠재우려 했던 것 같다. 《회색의 고요》에서 볼 수 있었던 <일신아파트>(2022)는 그 연장에 놓인 그림으로, 수직 수평의 건축적 요소들이 입방체의 양감을 견고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그는 오래된 아파트 정면을 향해 쏟아지는 빛과 그림자의 형태를 (작은 화면 속에) 대각선으로 웅장하게 그려냈다. 한 쌍의 고대 조각상처럼, 빛을 향해 우뚝 서 있는 아파트의 외형은 흑백의 명암 속에서 현실의 소외를 딛고 제 원형에 다가가려는 다짐을 드러낸다.


   고가도로는 아파트만큼이나 공간적 상승을 욕망한 기념비적 시각을 함축한다. 그런 의미에서, 회색 콘크리트 더미의 수직적 구축은, 김기찬의 연필 소묘에서 흑백 명암의 침묵과 부재로 옮겨진다. 그는 고가도로 밑, 마치 1990년대 홍콩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대적인 도시 이면의 그늘을 관통한다. <고가도로 밑 풍경_1>(2024)과 <고가도로 밑 풍경_2>(2024)는, 그가 일본 여행 중에 포착한 풍경으로, 아시아의 도시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이면을 익숙하게 보여준다.

 
   사실, 김기찬은 자신의 한뼘짜리 연필 소묘에 대해 말할 때, 현대, 아시아, 도시, 기념비 등의 범주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되레, 이러한 단어들이 작고 정교한 연필 소묘에 어떤 거창한 명분을 (부당하게) 부여하지는 않을까 해서인지,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 가까운 여행지, 대중교통 노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상적인 장소의 풍경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지 그리기에 열중한다.


   <뿔과 도시>(2024)는, 어쩌면 그러한 정황 속에서 김기찬의 연필 소묘가 담아내려 했던 “회색의 고요”에 대해 증명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가도로 밑의 풍경을 그린 그림에서부터 점진적으로 확대된 종이의 크기는, <뿔과 도시>에서 세로 51.3cm, 가로 36.3cm로 한껏 증폭한다. 그는 일본 여행 중에 도시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고층 건물 유리창 앞에서 저 무심한 건축물들의 빼곡한 배열을 그려 볼 생각을 했을 테다. 그것은 다소 무모해 보일 정도다. 마법에 의해 잠시 동결된 현실의 시공간처럼, 진공 상태의 침묵으로 현실을 늘어뜨려 놓은 이 그림의 시도는, 수수께끼 같은 얼룩만 남겨놓은 현실 너머의 “볼 수 없음”에 대한, 그 부재에 대한 상상의 감각일 것이다.


   말하자면, <뿔과 도시>의 오른쪽 모서리에 불쑥 튀어 나와 있는 흰색 “뿔”의 부재 같은 것이다. 건물 외벽에 가장 근접해 있었던 어떤 형상이 시야를 가리는 “공백”을 불러온 우연한 사건처럼, 그는 가능하면 “똑같이 그린다”는 목표가 함의하는 “실패”를 의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실패란, 그가 실재와 허구가 뒤섞인 현실 풍경을 걷는 동시대의 “보행자”를 자처하면서 시각이 아닌 손의 감각에 주목하려는 솔직한 속내에서 비롯된 것 같다. 마치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글을 똑바로 옮겨 적는 행위처럼, 그는 어떤 형상의 원형을 향한 충동과 감각을 움켜쥐고 있는 현실의 “한 사람”을 보여준다.


   《회색의 고요》는 침묵처럼 아무 것도 없는 “부재”를 떠올리기도 하고, 무채색의 “부재”까지 덧붙여져, 보고 듣는 것에 대한 불가능을 함의하는 것으로 이끈다. 정밀하고 섬세하게, 풍경을 있는 그대로 옮겨 그리기 위해, 종이와 연필의 물성(의 한계)을/를 극단적인 손의 감각으로 펼쳐 놓으려 하는 한 사람의 그리기 행위는, 사실상 “빛”과 “중력”에 의해 미세하게 변화해 온 흔적들을 향하고 있을 것만 같다. 어느 날, 한뼘 크기의 종이가 빛 바랜 얼룩의 무게를 비로소 드러내게 될 것처럼, 그는 그 변화와 소멸을 이끄는 거대한 실체에 대하여 상상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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