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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
Over and Over


윤상렬
더 소소
2024. 6. 7 - 7. 5

 

지금 여기 내가 있다

 

전희정(갤러리 소소)

 

    한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효율적인 구획으로 잘 정돈되어 있는 공간은 한 사람과 오랜 시간을 보내며 정갈하게 다듬어진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아주 익숙하게 이곳으로 들어온 작가는 가만히 앉아 한동안 시간을 갖는다. 이윽고 그는 손을 뻗어 미리 준비해둔 흰 종이를 작업대에 올린다. 작가는 이 종이 위에 자를 대고 샤프 연필로 긴 선을 긋는다. 작가를 둘러싼 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던 공간은 이 선을 시작으로 참았던 숨을 내뱉는다. 시작이다.  

始點

    윤상렬은 자신의 작업이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외부적 갈등으로 인한 두려움, 선택에서 오는 두려움 등 그가 예시로 드는 두려움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감정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고 그 과정을 작품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그것이 희로애락과 같은 감정의 종류 중 하나로 보이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감정적 두려움들이 無로 돌아갔을 때 오는 정체성의 혼란에 가깝다. 삶의 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을 인식하게 하는 수많은 관념들이 무의미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나의 존립 자체를 흔들리게 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흔들리는 無의 바다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가 하는 작업의 원동력이다. 작가는 존재를 흔드는 원초적 두려움(Fear)을 ‘진실처럼 보이는 거짓된 증표(False Evidence Appearing Real)’라 명명하고 이에 맞서 진실된 신호를 하나하나 짚어왔다.

時點

    두려움이 만드는 혼돈의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집요하게 직시하는 것이다. 그는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의 감각, 호흡, 생각을 예리하게 의식하며 삶의 다양한 국면을 맞이했다. 그가 자신의 시간들을 어느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고 흔적을 간직해왔다는 것은 그간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라이트패널 위에 샤프심을 올린 작업들은 조명제작에 관여했던 그의 경험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작업의 주요 재료인 샤프 펜슬은 어릴 적부터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던 친숙한 소재였으며,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필름이나 아크릴 판 위에 선을 새기거나 프린트하는 것 역시 기술에 대한 관심과 경험을 반영한다. 다양한 제작 경험으로 그는 지금도 프레임 제작을 직접 계획하고 적합한 재료를 찾아내 손을 본다. 더 과거로 가면 손수 도면을 그려 집을 짓고 그림, 가구와 같은 예술에 대한 고아한 취미를 가졌던 아버지와의 기억이 섬세한 취향의 밑바탕이 되어 있고, 놀이터의 정글짐에서 수직 수평의 봉에 몸을 부딪치며 느낀 감각과 그 위에 올라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사색적 특징은 지금의 작업에도 뚜렷하게 보인다. 이렇게 삶의 모든 순간들은 작가 윤상렬에게 혼란의 바다에서 두려움을 헤치고 나가 자신의 존재를 하나하나 새겨나가는 도구로 작용해왔다.

 

視點  

    그가 예리하게 유지하고 있는 취향과 감각이 작품에서 선이라는 형태로 보여지는 것은 무척이나 그답다. 방향성을 가지고 뻗어가는 선의 특성은 날 선 의식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그의 작업을 시각적으로 대변한다. 자를 대거나 계산해야만 나올 수 있는 직선의 인공적인 성질은 흘러가는 삶을 그저 수용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조작하고 개발하는 인간의 특징에 대한 시각적인 은유이다. 이렇게 아주 인간적이고 의식적인 선을 이용한 작업은 결과적으로 보는 사람의 시각에 혼돈을 주는 모습으로 완성된다. 이는 작업 과정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계산된 작업을 하면서 그 안에 계산되지 않은 것이 포함될 것을 생각한다. 선을 그을 때 그날의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떨림이 선에 반영되고, 긴 자의 휘청거림 때문에 선이 아주 미세하게 휘는 것을 알고 있다. 배접 과정에서 종이의 물리적 팽창 때문에 예상치 못한 변형이 생기는 것을 고려한다. 또한 컴퓨터로 하나하나 농도와 굵기를 조절해 그은 선을 아크릴판에 프린트한 뒤 손으로 선을 그은 종이 위에 덮음으로써 선의 정체를 선으로 덮는다. 이를 다시 유리로 덮어 사방을 프레임으로 감싸 고정한다. 종이와 아크릴 판 사이, 그 위를 덮은 유리, 이 세 판을 고정하는 프레임의 사이에 있는 머리카락보다도 얇은 미세한 공간들은 그가 애초에 그었던 선으로부터 수많은 겹을 발생시킨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선의 모든 과정을 너무나 선명하게 간직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정체를 감춘 모습으로 관객 앞에 선다. 이것은 진실이 눈 앞에 있지만 그것을 볼 수 없는 인간의 시선이다. 작가는 이를 침묵한 채 응시함으로써 세상의 본질과 자신의 존재를 향해 깨어 있을 것을 관객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始點

    날것의 샤프심으로 만든 직선으로 시작해, 종이에 샤프심으로 직접 선을 긋고, 그 위에 다시 디지털 방식으로 만든 선을 덮어온 윤상렬의 작업은 결국 연결된 하나의 선 위에 있다. 그는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모든 과정을 차곡차곡 밟아 왔다. 거짓된 징표를 하나하나 파내어 그것을 확인한 후 다시 덮고, 조금 밝혀 그 진실을 본 뒤 내려놓아 어둡게 하고, 조금 높게 들어 올렸다 다시 내리면서 들숨 날숨처럼 조금씩 조금씩 선 위를 걸어왔다. 그의 작업은 이처럼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선의 시작과 끝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작업이 결국 사라지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 말한다. 선은 시작과 끝이 있고,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끝나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가 《시점》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위해 준비한 작품들이 흑과 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에서도 백의 구성이 훨씬 많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흰 작품들은 사실 하얗지 않다. 희다는 그 넓은 개념의 범위를 하나하나 드러내며 그 곳을 파헤치는 조금 밝은 작품인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선들로 인해 검게 보였던 조금 어두운 작품들에 비해 명백히 하얘서 마치 작업의 사라짐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다른 작업과 마찬가지로 선의 사이 어딘가에 있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며 모든 것을 맞닥뜨렸던 그가 맞이한 또다른 시작점인 것이다.  

    윤상렬은 항상 화살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이미 그가 화살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화살처럼 단호하게 자신이 결심한 대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모든 과정을 단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밟으려 할 것이다. 그는 그 모든 선을 지나 결국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부재가 선명한 흔적으로 남아 존재를 증명할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모든 순간마다 어느 시점에서 어딘가를 향해 나아감을 반복할 것이다. 지금 여기 그가 있음을 그렇게 증명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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