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평원
A Field

 
박기진
더 소소
2023. 8. 18 - 9. 15

나는 포병 관측장교로 DMZ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내가 매일 보았던 철책의 내부에 수목과 능선, 구릉과 개울이 미묘한 감동과 슬픔을 주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이 느낌이 너무나 생소해서 나중에 언젠간 작업으로 풀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곳에 관한 기억을

존재와 시간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땅은 그리워하지 않는다. 가끔 온몸으로 진동할 뿐.

2001년 멸공OP에서 바라본 민들레 평원과 오성산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과 손바닥에 땀이 날 만큼 두려움과 숨이 멎을 것 같은 적막함이 요동치는 동시에 마치 초겨울에 시작되는 북서풍을 맞는 것, 폭풍이 치는 바닷가에서의 파도 소리, 폭풍 전의 고요함,

눈이 내릴 때의 아늑함 같은 것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미묘한 감정이 마음에 남았다. 새벽의 냄새가 머리에 남았다. 수많은 기억이 두 눈에 남았다.

살아가는 것은 고단하다. 살아가는 것은 재미있다. 살아가는 것은 아름답다. 아아 그냥 살아가자.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세상은, 삶은

가고 있겠지. 아아 그냥 살아가자.

서리가 내린 민들레 평원과 만도 평원 그 차분함 뒤에 눈 덮인 오성산이 있는 이곳에도 늦겨울 가느다란 온기의 햇살이 떴다. 푸른 새벽

안개가 흐른다. 들판에서 고개 어귀로 집중되는 수많은 자국들. 그 속도감..

하늘은 말랑말랑하기가 그지없다. 수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아무리 갈라도 그 자취는 없다. 오는 이 막지 않고 가는 이 잡질 않네. 하늘은 담대하다.

 

*

 

고여있는 시간은 그 사이가 너무나도 촘촘해 아무리 쪼개도 공간이 없다. 경계가 없다. 숨 막힌다.

살다 보면 좋은 날 오겠지. 철원의 쓴 녹즙 같은 녹색과 오렌지색 파주 하늘, 누상의 낮은 촉광의 노랑과 어두운 부산의 푸르름과 서평의 그리움과 강릉의 뜨거움이 평원에 내렸다. 겹쳤다. 그러면 알겠지. 이미 좋은 날인 걸.

그 소나무와 소나무의 사이에도 엄청난 속도감으로, 진동으로.

그 기억은 그곳에 남아있다. 박제되었다, 변질되었다. 그렇지만 가끔 데자뷰가 온다. 변질된 기억이 소환된다.

백두봉으로 가는 길 기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넓고 완만한 사면을 만났다. 철원의 평원을 닮았다. 능선들이 둘러싼 고원은 그 기억을 소환했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이 너무도 알량하여 이것저것 여기저기 우당탕탕 뱅글뱅글 섞여 있다.

모터는 진동을 만들고 모터는 바람을 만들고 푸른 시간을 고정하고 고정한다. 타들어 가는 마음은 얼굴의 곰보같이 얼룩지네, 그 자국이 점점 아련해지네.

숨어서 바라본다. 숨 막히는 풍경을 숨 참고 바라본다. 얼른 숨는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그 여름, 그 더위, 그 순간. 두꺼운 모직 코트의 옷깃을 세우고 살을 베는 듯 아리는 얼굴로 바라본다. 아지랑이 피어

나는 그 여름, 다라이에 솜 이불처럼 부푼 희망을 보았다.

박기진

bottom of page